the deep end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닫은 현관문에 어깨를 맞붙이고서야 사쿠라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겨드랑이 아래로 양팔을 둘러서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어 있는 남자 역시 입안에서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귀를 가까이 들이대어 보아도 어떤 단어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아무런 보호막 없이 맨 목덜미에 바로 닿아오는 숨결이 타오를 듯 뜨겁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사쿠라이는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만 있다면 적어도 5분 이상은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츠모토가 현관 바닥에 주저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몇 년 만의 둘만의 저녁 식사였다. 다른 멤버도, 그 어떤 완충제 역할을 해줄 만한 사람 없이 단둘이서는. 명목상으로는 콘..
번역 관련 공지 확인하기 / 1편부터 읽기 쥰은 재빠르면서도 꼼꼼하게 샤워를 끝내고,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문턱을 나서자마자,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쇼와 시선이 맞았다.쥰은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쇼의 시선이 헤엄치며, 자신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것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의 앞에 가서 섰다.“당신이 요청한 대로 샤워했어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음에도 쥰은 말했다.“그렇네요.” 대답하는 쇼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마치 쥰을 만지기 전까지 겨우 몇 초 만을 남겨 놓은 것 같았다. “당신에게서 정말 좋은 냄새가 나요.”“그리고요? 또 뭘 원하죠?” 쥰이 물었다. 제 왼쪽 젖꼭지 옆에 있는 점에 쇼의 시선이 멈춘 것을 바라보며.“지금부터 섹슈얼한 관계..
마츠모토의 상냥한 얼굴 대신, 고소한 기름 냄새와 작게 울리는 환풍기 소리만이 사쿠라이를 반겼다. 현관에서부터 자연스레 침샘이 돋구어졌다. 이미 밤 늦은 시각, 한참 전에 저녁 식사까지 마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러면 먹지 않을 수가 없지. 외투를 벗어내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몰고 들어온 찬 기운은 금방 사그라들게 만드는 따뜻한 실내 덕분에, 넓게 벌어진 어깨와 흉곽의 라인을 잘 드러내는 남색 티셔츠를 입은 마츠모토의 뒷모습을 부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좋은 저녁.”“응. 수고했어, 쇼군.”“야식?” 응, 안주, 라고 말하는 마츠모토의 어깨 너머로 프라이팬 위 맥주를 부르는 비주얼을 바라보며, 사쿠라이는 입맛을 다셨다. 몸을 관리하는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사치스러운 즐거움을 누리지 못..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당장이라도 보고 싶던 얼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1교시도 시작하지 않은 이른 시각, 중간고사 기간이 끝이 나고 어느덧 쌀쌀해진 캠퍼스. 선배의 동선 쯤이야 이미 훤히 꿰고 있으니까. 지금쯤이라면 자주 가곤 하는 산책로 벤치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학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학과 건물 앞 흡연 구역에 있을 테지. 다행히 첫 번째 탐문 장소였던 식당 한구석에서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다짜고짜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사쿠라이 선배.”“아아, 마츠모토. 놀랐잖아. 언제 왔어?”“선배는 연애 안 해요?” 수십 번을 생각하고서도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이 있기도 한 반면, 어떤 결정에 있어서는 한 번 마음 먹으면 무..
열기가 숨구멍을 죄어올 것 마냥 덥게 데운 욕조에 지친 몸을 누이며 사쿠라이는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 위로 여러 얼굴들을 떠올렸다. 두 손으로 몇 번이고 뜨거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목과 어깨를, 물에 잠겨있는 허리와 골반을 매만지며 몸에 쌓인 피로를 녹여버리고자 하는 익숙한 일련의 과정을 밟다 보면 이윽고 이어지는 행위 역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이유는 나름대로 짐작할 뿐이었지만 유독 사쿠라이에게만 엄하게 대하는 학회 선배의 굵고 검게 그을린 손목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가끔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남자의 척추가 제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던 모습을 되새길 때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앳된 얼굴 아래 성숙한 남자에게 어울릴 법한 색을 머금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