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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아라시팬픽/쇼쥰] 야구공

SPICA*쥰 2016. 6. 12. 03:49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이렇게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유독 자신에게만은 오냐오냐 해준다는 것은 마츠모토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사쿠라이가 제게 해준 일은 친누나도 해주지 않을 일이라는 것도. 오히려 메구미는 딱히 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을 거였으면서 너희 사귀니? 하고는 굳이 소리내어 물어보고 저들을 앞질러 가는 바람에, 쥰이 메구미의 뒤에다 대고 시끄러워! 외치는 동안 사쿠라이가 멋쩍은 웃음을 짓게 만들었었다. 

어쨌든 오늘도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백팩을 둘러멘 마츠모토는 대문을 나와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이내 몸 앞으로 크로스백을 멘 채 자전거를 탄 사쿠라이가 골목을 돌아 나타났다. 사쿠라이네가 옆 골목에 이사온 후로부터 몇년 간 봐왔던 모습이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의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쇼군!

쥰군, 좋은 아침!


제가 서 있는 바로 앞까지 온 사쿠라이의 자전거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츠모토는 정강이 반쯤까지 깁스한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반대쪽으로 넘긴 후 자전거 의자에 걸터 앉았다. 확실히 남학생 둘이 탈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아침에 병원 먼저 간댔지?

응, 선생님한테도 어제 이야기했어. 쇼군은 나 역앞 사거리에서 내려주고 먼저 가.

허리 꽉 잡아.


그렇게 빠르게 밟지도 않으면서 사쿠라이는 매일 아침 제 허리를 꽉 잡고 몸을 가까이 붙이라고 닥달했다. 장정을 한 명 더 태운 자전거 페달을 더 세게 밟아야 하는 본인의 수고로움부터 시작해서, 뒤에 탄 사람 때문에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면 방향 컨트롤이 어려워서 더 위험할 수 있다느니, 혹여라도 이번에는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져서 다치면 어쩔거냐느니. 한번 잔소리를 시작하면 가는 내내 시끄러울 것을 잘 알아서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허리에 양 팔을 감아 제 손깍지를 끼고, 사쿠라이의 등에도 제 몸을 바짝 붙였다.

처음 전치 4주라고 들었을 때는 그렇게나 길게 느껴졌던 한 달이 어느새 지나버렸다. 그 사이에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갈아입는 기간이 되어, 이번주부터는 사쿠라이도 마츠모토도 둘 다 자켓을 벗고 반팔 셔츠만을 입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않냐, 여름이었으면은 덥기도 덥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얼마나 귀찮았겠냐 등의 이야기도 여러번 했었지만, 사실 마츠모토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요 며칠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반팔 셔츠와 언더셔츠 두겹씩 총 네겹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 천의 두께 너머로 제 가슴과 맞닿는 사쿠라이의 등에 제 심장 박동이 전달되는 것인지 아닌지였다. 자켓을 입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제 귓가에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것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다시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등교하는 사이로 돌아가면 괜찮아질 거야.

A 중학교 3학년 야구부 포수, 마츠모토 쥰. 뭐 요즘은 교내에 야구공을 밟고 넘어져서 엄지발가락이 골절된 그 야구부 선수로 더 많이 알려져 있을테지만. 

마츠모토군, 야구공은 밟지 말고 받으세요 - 사쿠라이

마츠모토 쥰은 깁스한 제 다리를 붙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선, 또박또박 쾌차 기원 메세지도 아닌 메세지를 적고서는 본인의 개그라고 인정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가 뿌듯한지 킬킬거리면서 웃었던, A 고등학교 2학년 사쿠라이 쇼가 요즘 보통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야구부 부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다음 날. 시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동네라 등교길은 자전거를 타고서도 15분은 족히 걸렸고, 그 거리를 목발을 짚고 걸어간다는 선택지는 마츠모토에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덩치는 좋지만 영 형편 없는 운동신경을 물려주신 아버지는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줄 수는 있으나, 아버지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20분은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깁스 때문에 불편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것도 불만이라 부루퉁한 얼굴로 씻고 나온 마츠모토를 맞이한 것은 사쿠라이였다. 


엄지 발가락만 다쳤다면서, 왜 종아리까지 깁스를 한 거야?


다쳤다는 소식에 조금 일찍 찾아온 모양인지 쇼파에 앉아서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사쿠라이는 토끼눈을 하고서는 제 쪽으로 가까이 와보라며 손짓했다. 왜 깁스한 사람한테 오라 가라야. 


이래서는 자전거는 못 타겠네?


어젯밤에 전화로 다 이야기했잖아. 또 대충 들으면서 대답만 했던 거지, 하고 심통부리려던 찰나-


내 자전거 타고 가자. 뒷자리에 태워줄게.

아버지가 차로 태워준댔는데..

학교까지 왔다가 가시려면 한참 돌아서 가셔야 하잖아. 내가 태워주는 게 낫지.


쇼군이 힘들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면서 한사코 만류하시는 어머니에게 어차피 방향도 같고 괜찮다며, 그래도 얼굴은 안 다쳐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사쿠라이를 보며 마츠모토는 도와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사쿠라이네는 마츠모토가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사쿠라이가 중학교 2학년 때 이 동네로 이사 왔다. 그전부터도 부모님끼리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 일년에 한두번 정도는 만나고는 했었으나, 이사온 이후부터는 같은 학년인 쇼와 메구미보다도 쇼와 쥰이 둘도 없는 절친이 되어 어울려 놀았다. 햇수로는 1년 터울이기는 해도, 학년은 2학년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서로 좋아하는 취미가 비슷해서 CD도 돌려듣고 영화관도 같이 가고. 그리고 둘 다 워낙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는 덕에 밤새 전화기를 붙들고 수다를 떠는 일도 빈번했다.

사쿠라이는 작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지만, 이 동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큰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아침에 마츠모토의 집 앞에서 만나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일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사쿠라이가 고등학교 방과 후 활동 및 입시 준비로 바빠지고, 마츠모토도 야구부 활동을 시작하며 중학교 때처럼은 하교까지 함께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쿠라이가 자처해서 마츠모토 전용 자전거 운전수가 된 기간 동안에는 일주일에 두세번은 하교 시간에 중학교 1층 현관 앞에 와서는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와서 선생님들 얼굴도 뵙고 좋지 뭐.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날에는 마츠모토는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전화를 받고 내려가면 혼자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탓에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쿠라이의 모습을 마주하는 게 스스로에게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만큼 좋았다. 


마츠모토, 오늘도 데리러 오셨더라?


같은 반이자 같은 야구부인 니노미야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복도 창문 너머로 들을 사람은 다 들으란 듯이 외칠 때도 있었지만, 마츠모토는 작년까지 아이바군 자전거 얻어 타고 다닌 건 누군데 하고 쏘아붙이고는 잽싸게 계단을 내려가곤 했다. 

그렇게 사쿠라이의 등에 꼭 붙어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집에 가는 길은 늘 기분이 좋았다. 그럼에도 사쿠라이의 목덜미에서 나는 땀냄새를 맡으면서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건, 깁스한 지 2주도 안 되어서 다친 발에 체중을 싣지 않도록 살짝 신경만 쓰면 충분히 학교 복도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마츠모토는 간밤의 꿈 이야기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어젯밤 드라마를 봤는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곧 있을 시험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제가 말이 없으면, 본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을 사쿠라이도 별 다른 말 없이 페달만 묵묵히 밟아 나갔다. 이미 초여름의 해는 높게 떠 있지만, 어쩐지 고요한 아침 골목이었다. 


쇼군, 저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저기서는 병원까지 한참 가야하잖아.

그래도 병원은 학교랑 반대 방향인걸.

괜찮아, 조금 늦어도. 나도 어제 이야기했어.


뭘 이야기해? 빨간 신호에 자전거를 멈춰 세운 사쿠라이는 마츠모토의 질문에도 잠시간 대답 없이 앞만 보고 서 있다가, 동생 병원 데려다 줘야한다고 했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동생. 동생이지. 

마츠모토는 손깍지를 풀어내고선 사쿠라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핑계 대고 수업 째도 된다고 누가 그랬어. 사쿠라이는 언제나처럼 과장해서 간지러워하며 이내 다시 페달을 밟았다. 내가 그랬다. 사쿠라이 쇼, 이 학생 못쓰겠네. 수업 하나 안 듣는다고 큰 일 나냐. 모범생이 왜 이러실까.


나 같이 안 들어가봐도 돼?


병원 앞 주차장 한 구석에 자전거가 멈춰서자 마츠모토가 사쿠라이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고선 먼저 내렸다. 됐어, 나 혼자 갈 거야. 학교 가든지, 여기서 기다리든지 해. 어쩐지 겨우 두 살 많은 주제에 보호자 행세하려 드는 것 같은 모양새에, 마츠모토는 혼자서 병원도 못 오는 어린애 취급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직까지 혼자 와 본 적은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쿠라이가 자전거 보관소에 자물쇠를 걸어두는 동안, 마츠모토는 기다리지 않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깁스를 풀면 후련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 한 달 사이에 깁스가 주는 압박감에 익숙해진 탓인지, 마츠모토는 제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잘게 부서져내리는 석고 조각들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괜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깁스에 갇혀 있던 마츠모토의 엄지 발가락을 만져보는 동안 작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사쿠라이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당분간은 틈틈이 물리치료도 받으러 오고, 야구부 활동은 따로 이야기할 때까지는 참여하면 안 된다. 발 밑 잘 보고 다녀라. 병원 복도로 나와 의자에 걸터앉은 마츠모토는 백팩에 넣어온 운동화 한 짝을 꺼내, 의사 선생님의 마지막 말에 얘는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서 넘어진다구요 하고선 아직까지도 키득거리는 사쿠라이에게 건넸다. 운동화를 받아든 사쿠라이를 흘겨보며, 마츠모토는 잔뜩 심통난 표정으로 오른쪽 발을 쭉 내밀었다. 사쿠라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츠모토를 내려보며, 왼쪽 입꼬리를 당겨 올려 씩 웃었다. 


오늘까지만이다.


마츠모토는 막무가내인 제 억지를 받아주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운동화를 신겨주는, 왁스로 멋을 내 살짝 세운 사쿠라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깁스를 풀었으니 이제 쇼군의 자전거 뒤에 타는 것도 마지막이다. 아직 일년 반이나 지난 후에나 닥쳐올 일이긴 하지만서도, 쇼군이 대학에 진학하면 이렇게 같이 등교하는 것도 끝나버릴 것이었다.


쇼군, 있지.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제 등교하는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 사쿠라이와 마츠모토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자전거 뒤에 타서 등에 기대어 있는 것에 깁스라는 변명거리가 없어진 듯한 민망함에,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고 대신 허리춤의 셔츠를 잡았다. 


뭔데?

들어줄 거야?


무슨 부탁인지 먼저 말을 해줘야 생각을 해보지. 쥰군,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거 있을 때는 그렇게 다짜고짜 이야기하는 거 아냐. 나나 되니까 너 억지스러운 투정 다 받아주는 거지. 사쿠라이의 볼멘 소리가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나도 아무한테나 투정부리는 거 아니거든,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마츠모토는 사쿠라이도 모를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쿠라이가 다 받아주는 거 아니까, 투정도 부리고 억지도 부리는 거라는 걸. 


나 과외 해주라. 영어. 쇼군 수험생 되기 전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언젠가 끝나게 될 가까움이라면, 조금만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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