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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팬픽/쇼쥰] 성실한 나루미씨의 어느 기묘한 오후

SPICA*쥰 2018. 4. 22. 20:30

 “전 남친일까나아….”

 문장의 마지막 단어 끝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말투는 너무나도 익숙한 애인의 것임이 분명했는데, 어째 평소의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 정도는 높지 않냐는 부차적인 감상을 가지며 나루미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즉각적인 반박과 함께.

 “전 남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 히로토?”


 미야마 히로토는 나루미 료스케의 올해로 3년차 남자친구로, 이유는 후에 설명할 예정이지만 ‘남자친구’ 앞에는 ‘전’이 붙지 않는다. 절대로! 물론 나루미가 도쿄를 잠시간 떠나 있는 동안, 만 2년 5개월의 연애 기간 중 대부분을 장거리 연애를 해야 했던 것은 온전히 나루미의 탓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았다.

 첫째로 어차피 둘 다 함께 도쿄에 있을 때도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찾느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너무나도 바쁜 미야마 변호사 때문에 연애 초기에도 일주일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러니 장거리 연애에 돌입하게 된 이후로도 만남의 빈도가 전에 비해 더 줄어들었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나루미가 예상치 못하게 도쿄로 돌아온 이후 역시나 예상치 못했던 급격한 일신상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붓느라 오늘까지 1달 가까이 만나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둘째, 매일 한 번씩의 전화 통화를 나누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연인임은 틀림없었다. 물론 나루미를 약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 이전에도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 나루미가 먼저 전화를 거는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미야마가 그 전화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에 겨우 안도한다는 사실이랄까. 어찌 되었든 셋째, 헤어지자는 말 따위는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제 변명의 근거를 늘어놓고 있는 나루미의 양심을 콕콕 찔러대는 것은 며칠 전 밤의 그 통화일 것이었다. 미야마가 그런 것에 심통을 부리는 것은 처음인 듯해서 나루미는 어쩐지 조금 기쁘기까지 했지만, 몇 날 며칠 ‘액티브 러닝’이라는 것을 찾아보며 어떻게 실제 교실에 적용할 수 있을지 여러 시나리오를 고민하며 낯선 교수법 책에 코를 박고 있던 나루미는 미야마의 데리러 와달라는 부탁에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역시 그때 찾아갔어야 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전 남친이라고까지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아무튼 ‘전’이냐 ‘현’이냐 하는 것은 나루미에게 있어서 변호사인 애인에게 사사건건 따지고 봐야 할, 승률은 낮아 보이지만 절대 져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보다도 더욱 시급한 문제는 마다라메 법률사무소의 형사사건 전문 팀의 미야마 히로토 변호사의 자리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왜? 대체 왜?”

 처음 얼굴을 들이민 애인의 직장에서 민망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나루미의 목소리가 꼴사납게 뒤집어졌다. 평소에도 어떻게 하면 주변 사람을 놀려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그 작은 머리통 안에서 장난꾸러미가 뒤죽박죽 재빠르게 굴러가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루미와 미야마가 이미 통념적인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길다고 하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연애 기간 중 그 장난의 대상이 나루미가 된 것도 양손으로 다 꼽을 수도 없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링과 관련된 것으로… 흐흠, 이것도 우선 급한 일은 아니니까.

 “나루미군, 나 만나러 온 거 23일만이자나? 연인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겠써어?”

 “아니, 그거 말고!”

 “변명이 있따면 우선 들어는 볼게. 나루미군?”

 왜 평소처럼 료-군이 아니야? 하는 질문도 지금 급한 게 아니고.

 “너.. 너 왜 그래? 왜 작은 거야?!”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나 되어 보이는 모습의 꼬마 남자애가 왜 제 애인의 행세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무슨 소리야. 내가 나루미군보다 2센찌 더 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거기다 왜 나루미만이 이렇게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며, 서른셋 남성의 멀쩡한 허우대를 갖고 있던 미야마는 왜 이렇게 멀쩡한 얼굴로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느냐는 것이다. 제 허리춤까지 밖에 안 올 것 같은 키에, 터질 듯한 양 볼에 파묻혀버린 광대, 짧게 줄어든 팔다리 등 외양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은 나루미가─최근에는 조금 소홀했을지라도─사랑해 마지않는 애인의 모습과 너무나도 같아서 다른 사람이 행세하고 있다는 의심은 차마 하지도 못했다. 

 어쩌다 이런 꼬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몸을 바꿔치기 당했나? 어떤 마법사의 심기를 건드려 마법에 걸려버렸나? 미야마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인데. 마구 뻗어나가던 생각의 줄기들을 되짚던 나루미는 이 꼬마를 제 애인이라고 쉽사리 인정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유달리 고요한 오전과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 수업이 시작되려 하자 케이메이칸 고등학교 교장 나루미 료스케는 오늘 마저 결재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생각하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생전 겪어본 적 없는 편두통으로 머리 옆쪽이 쑤실 듯이 아프기 시작하지만 않았더라도 퇴근까지 별다른 일 하나 없는 날이 될 것 같았는데. 교장실 소파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고 있어 보아도 전혀 가라앉지 않자 효능 좋은 약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호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 미야마에게 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와주세요.

 ─ 혹시 몰라 마다라메 사무소 주소를 덧붙입니다. 도쿄도… 

 미야마에게서 온 메일이이었지만 미야마가 쓴 것 같지 않은 말투의 메일. 마다라메 사무소라면 몇 달 전부터 출근하기로 했다던 그 법률사무소이니 적어도 사고라든가 납치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몇 번을 걸어보아도 통화 중으로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나루미는 결국 학교에서 뛰쳐나왔다.

 미야마의 모습에 넋이 팔려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문득 정신을 차린 나루미가 주위를 둘러보자 동료들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최소한 사무실 사람들의 반응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기대할만한 반응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루미에게는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쿄 시내를 가로지르는 내내 미야마의 여러 장난 중 하나일 거라며 애써 불안감을 내리누르려 했던 나루미 앞에 나타난,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꼬마는 나루미의 두통을 더욱더 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몸만 작아진 탓에 늘 입고 다니는 남색 수트의 허물 더미 아래에 파묻힌 상태 그대로 앉아있는 미야마에게 수더분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일단 뭐라도 입어야 하지 않겠냐며 후드티와 면바지를 꺼내 왔다. 쌍둥이 딸을 가진 아빠들은 늘 이렇게 여벌의 아이들 옷을 가지고 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루미는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빠 경력 얼추 10년 차라며 자신을 소개한 마기상이 미야마의 옷을 갈아입는 거 도와주겠다며 데려가자 홀로 남은 나루미에게 사무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사무실 문 앞에서 만난 나루미를 안으로 들여주기 전, 미야마와는 무슨 관계냐며 물어보았던 똑부러진 일자형의 앞머리를 가진 여성은 나루미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왔다.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미야마의 휴대폰을 뺏어 메일을 보낸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나루미는 자신이 보호자이니 제가 데려가겠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병원에 간들 어떤 해결책이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아니, 그래서 두 분… 사귀는 거?”

 “아아,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그렇습니다만….”

 또 다른 중년 여성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제서야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루미가 급하게 자켓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몇 장을 제 주변을 둘러싸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건넸다. 다들 명함을 받아들고선 어리둥절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교장인데요…

 “나루미 료스케입니다. 교장직을 맡고 있는 이유는 미야마군이.. 설명을 하지 않았겠군요. 제 존재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은 듯하니 뭘 기대하겠어요, 하하하..하하.”

 멋쩍은 나머지 나루미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미야마의 동료들은 어색하게 살짝 따라 웃는 정도에 그쳤다. 이런 반응이라면 사무실 사람들은 그동안 미야마의 성적 지향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 앞에, 그에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놀라움을 선사하고 만 커밍아웃은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가면 좋으련만.

 “게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라 ‘그’ 미야마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니까….”

 도쿄에 다시 돌아온 후로는 처음, 간만에 만난 아카시상의 난처한 표정 뒤로 타치바나상이 그렇게 작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법률사무소 직원들이라 그런지 혹은 그런 직업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인지는 나루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동료들은 미야마의 사생활이 살짝 드러나려는 틈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어떻게 미야마와 사귀기 시작한 거냐, 누가 먼저 고백했냐와 같은 의외로 매우 사적인 질문들에 약간의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나루미가 순순하게 대답해주었음에도―처음 만난 건 카페에서였고요, 그때도 그 조미료통 아시죠? 그걸 갖고 있었는데 제가 그게 신기해서, 아 고백도 제가 먼저 했죠, 네네 벌써 2년 넘게 사귀고 있는데, 흐흐 그렇게까지 놀라시면 제가 민망한데―동료들은,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타치바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미야마 본인이 연애라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뿐이지, 은근 어딜 가든 사랑받는 게 당연할 정도로 몸에 배어있는 애교도 많았다. 나루미는 사무소 사람들이 왜 미야마를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취급하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첫 고백 후 사귀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되새겨보면, 굳이 나루미와 연애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미야마를 설득하기 위해 영업 사원의 특장점을 최대한 살려 온갖 이점을 프레젠테이션 했던 나날이여. 오히려 첫 섹스로까지 이어지는 섹슈얼한 관계에 돌입하는 것은 비교적 상당히 쉬웠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그것은 한 번의 특출난 실전 덕택에…─ 그렇다고 해서 딱히 알려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던지라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이목구비만 화려하면 되는 것인지 사복도 마음에 드는 색상으로 하나만 줄기차게 입을 뿐인 미야마가 평생 입을 것 같지 않은 민트색 후드티를 입고 돌아왔다. 빌려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부루퉁한 표정은 귀엽기는 또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첫 눈에 반해버렸던 그 날 그 때처럼 미야마의 얼굴에서 눈도 못 떼고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짧아진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미야마는 취조를 당하고 있는 것마냥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나루미의 손을 잡아끌고서 제 책상 의자에 앉혔다.


 영업 사원으로서, 그리고 현재는 교장으로서 나루미 료스케의 가장 돋보이는 장점 중 하나는 적응력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장단점을 파악하고 문제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과정을 거치면 그 판단에 이어 결단하는 행동도 빠르다는 것이었다. 게이라는 것을 멍하니 깨달았던 중학생 시절, 몇 주 동안은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긴 했지만 긴 고민 끝에 매우 쿨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것도, 뜬금없이 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하고서도 얼마 안 되어 학교의 사이클에 완벽하게 적응해버린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교수법을 도입해보겠다며 온갖 면담을 진행 중인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 허벅지 위로 올라와서는 작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허공에 동 떠버린 두 다리를 통통 튕겨내고 있는 남자친구의 기묘한 상태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빠르게 적응해버린 것인데… 크기만 조금 달라졌을 뿐 미야마가 하는 행동에도, 그런 미야마를 대하는 나루미의 태도에도 사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일까.

 커다란 이목구비의 조합이 제 나이보다도 어려 보이는 인상을 만드는데, 거기다 귀여운 앞머리와 개구진 표정까지 더해지면 나루미가 한없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나루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야박한 점수를 주어보아도 도저히 포기할 줄을 모르는 말장난에서부터 형사 전문 변호사라는 직업은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한없이 유치한 행동을 할 때도 있었지만, 겨우 두 살 터울 밖에 안 나는 어린 애인을 하염없이 귀여워만 해온 버릇에는 별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종종 도를 넘는 장난에는 ‘자꾸 애처럼 굴거야!’ 같은 말 한두 마디쯤 했던 것 같은 기억은 나지만 그때마다 미야마는 싱글싱글 웃기만 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버릇을 잘못 들였던 건가.’

 이러나저러니 하며 투덜대고는 있지만 지금처럼 제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미야마가 부리는 못된 투정은 너무 귀엽고, 이제 어느 정도는 그 귀여움에 면역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루미였지만 지금처럼 꼬마의 모습으로 보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파괴력을 갖춘 것이었다….


 “미야마군은 여기 있어야 해요.”

 “아가는 못 가는 곳이에요~”

 “미야마군 빠이빠이~”

 “빠이빠이 해줘야지이이….”

 여러 사건의 공판이 연달아 다가올 예정이라며 몇날 며칠 이어지는 야근을 하고 있던 사무실 사람들은 잠시간의 카오스가 완전히 수습되지는 않았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에 언제 한눈을 팔았냐는 듯이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복귀했다. 다만 미야마가 진행하고 있던 사건이 문제였는데, ‘사건 담당 변호사가 갑자기 어려졌어요’는 접견을 미룰만한 그럴싸한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진짜 말도 안 된다고오….”

 그렇다고 꼬마애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잖니. 미야마는 납득할 수 없다며 탄식 소리를 낸다고 내었지만, 법률사무소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쨍하고 울려퍼지자 주변 사람들과 나루미는 웃음을 겨우 삼켜낼 뿐이었다. 타치바나는 미야마가 맡았던 사건의 첫 접견을 대신 가게 되었다며, 미야마의 사무 보조원인 아카시와 함께 나루미의 무릎 위 미야마의 볼을 만지작대다가 결국 그 손들을 팩, 쳐내고야 만 작은 손의 매운 손맛을 느끼고서야 꺄르르 웃으며 사무소를 나갔다. 아마 그동안 미야마가 많이 골렸음이 분명했다. 나루미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내 곧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사다 변호사가 이미 사무실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서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마를 발견하고서는 새된 비명을 질러댄 것과, 미야마가 혀가 마음껏 굴러가지는 않는 모양인지 ‘그 살인 싸껀 내가 다 찾아났자나요! 내가 재판 가기로 했자나요!’ 빼악거리는 목소리로 외친 것과, 결국 마다라메 소장까지 직접 찾아와서 잠시간 건강상의 이유라는 명목으로 강제 휴가 처리가 된 것까지. 그리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서도 한참을 사무실 유리 벽 너머로 제 상사를 노려보고 서 있는 미야마까지. 나루미는 이제껏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꼬마 애인을 어깨 위로 둘러업고서야 사무실을 뒤로하고 나올 수 있었다.



 아직 미야마가 사촌 형인 반도 상과 살고 있는 이토콘치로 가야하는 걸까, 운전대를 잡고서 잠시간 망설이는 나루미의 옆자리에 앉아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맨 미야마가 입을 뗐다.

 “반도에게는 내가 이야기 할테니까.”

 “뭘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지?”

 “료-군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야마에게 늘 진지하지 않은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미야마 덕에 조금씩은 늦게서야 알게 되기는 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닮은 꼴의 상처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기대한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신체만 어려졌을 뿐 제멋대로이면서도 재빠른 생각의 미야마는 그대로이겠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아껴주고 보호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히로토, 괜찮아?”

 “….”

 “어디 이상하고 그런 건 아니지? 괜찮은 거지?”

 문득 지금의 상태가 일시적인 것일지, 혹은 앞으로도 영영 이대로일지. 어느 하나 알 수 없어 불안해지는 마음은 입을 다물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른은 나루미였고, 어쩌면 본인이 제일 당황스러울 상황에 침착한 척, 태연한 척하며 버티고 있을 미야마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료-군.”

 기분 좋을 때 자주 그러는 것처럼 콧소리를 섞어 제 이름을 늘여 부르는 미야마의 애교에, 귀여운 목소리에 귀 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루미가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응?”

 “나 료-군 집에 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존댓말에 나루미의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놀란 나루미의 반응을 즐기는 듯이 낄낄 웃어보이는 미야마의 표정은 그 아기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걱정하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어느새 안전벨트를 다시 풀어낸 것인지,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작은 손바닥이 나루미의 목덜미에 뻗어왔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촉감에도 불구하고 적응력이 너무 좋은 나루미는 이전의 수십 번의 상황들을 손쉽게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안돼, 적응하지 마! 지금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란 말야!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이미 미야마가 이끄는 대로 조수석으로 몸을 한껏 기울여버린 나루미였다.

 “아, 안 돼.”

 “왜 안 돼?”

 “너 지금.. 지금 꼴을 보라고!”

 “내 꼴이 어때서!”


 네 주장대로라면은 아직 우리 연인 사이인 것 아니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성인 남성일 때의 이야기가 아니냐, 갑자기 몸이 이렇게 된 것 뿐이지 그렇다고 내가 성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열 살 꼬마에게 키스를 해야하는 건데 어떻게 그러냐… 현재 신체의 완력 차이에서는 절대 질 수 없는 다툼이었지만, 잠시간 키스를 하니 마니 하며 투닥대고 있노라면 미야마의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기막힌 타이밍이네.”

 반도에게 오늘은 나루미 집에서 자고 갈거니까 기다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미야마를 보면서도 나루미는 여전히 휘몰아치는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너무 쉽게 수긍하지 말라고, 이건 꿈이야! …근데 꿈이면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응?”

 “반도가 바꿔 달래.”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깊이 대화를 나눈 적도, 딱히 안부를 전하는 사이도 아닌 남자친구의 사촌 형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 거지? 나루미는 당황함을 감추지도 못한 채 미야마가 얼굴에 갖다 대어주는 휴대폰에 귀를 갖다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응, 나루미군. 바쁠 텐데. 히로토가 또 심술을 부렸다며.”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미야마군은… 오늘 저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해서요.”

 아까 미야마가 직접 했던 말을 또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전화로 ‘당신 사촌 동생님이 갑자기 어려져서 제가 일단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데려가기는 할 건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키워도 될까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도 한두 번 밖에 못 봤지만, 히로토가 가끔 외로울 때 그러더라고. 곧 돌아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그게 무슨….”

 “자, 통화 끝.”

 반도가 이야기하는 게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나루미의 귓가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듣던 미야마가 휴대폰을 쥐고 있는 제 손을 치워버리고서는 통화를 종료시켜버렸다.

 “흐응?”

 얄미운 콧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은데, 그러다 빙긋 웃어버리는 것까지도 미야마 히로토가 맞는데. 너는 대체 누구니. 

 갑작스럽게 나루미의 가슴이 답답해진 것과 동시에 또 다시 머리가 우지끈 쪼개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고, 이내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 다음 나루미가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아파트 어두운 방 안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늦어 잠시간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에게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에 언제나처럼 혼자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히로토?”

 “깼네.”

 “언제.. 언제 다시 커진 거야?”

 “…아직 열이 안 내렸나봐.”

 나루미의 머리 맡에 서서 빤히 내려다보던, 키 173cm의 성인 남성으로 돌아온 미야마가 방바닥에 깔아둔 낮은 매트리스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릇 하나, 수저 한 쌍을 올린 쟁반을 발치에 내려놓고서는 나루미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이제 열은 없는데. 헛소리를 하는 이유는 뭐지?”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쌀쌀한 말투를 전했지만, 나루미로서는 반갑기만 한 미야마의 목소리였다. 

 “열이라니?”

 “흐음. 낮에 머리 아프다고 전화해서 데리러 갔었잖아. 학교에.”

 내가? 그제서야 낮에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머리가 너무나도 아팠던 것이 떠올랐다. 마다라메 사무소에 가서 정신없이 있는 통에 언제 두통이 사라졌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것보다 언제 돌아왔냐니까. 그 꼬마애에서 다시 돌아온 거 맞지? 이제 다시 안 변하는 거 맞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질문들은 미야마가 무자비하게 밀어 넣은 숟가락에 의해 막혀버렸다. 앞니에 살짝 닿은 숟가락에 미간을 찡그린 나루미는 혀에 닿아오는 고소한 맛에 그제서야 심한 허기를 느끼고서 다급하게 죽을 들이 삼키기 시작했다. 

 꿈이었나보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파서 헛것을 봤나봐. 그래, 당연히 꿈이지!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새어 나온 헛웃음에 나루미는 세 번째 숟가락을 미처 다 삼키지 못하고 잠깐 추한 꼴을 보였다.

 “료-스케군!”

 꾸짖는 것마냥 짐짓 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름을 길게 늘여 부르며, 주변 바닥에 놓인 티슈곽에 손을 뻗어 몇장 뽑아낸 미야마가 나루미의 입가에 티슈를 갖다 댔다. 멍하게 티슈를 받아 입가와 코 주변을 닦던 나루미가 이내 미야마의─어디까지나 아까까지의 아이의 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두꺼운 허리에 손을 두르고서는 매트리스 위로 드러누웠다.

 “으앗, 뭐야 갑자기!”

 “다행이야 진짜! 히로토 보고 싶었다구!!”

 되바라진 꼬마 히로토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히로토가! 아재 개그가 취미인 내 히로토가! 아직 나른하기만한 나루미의 몸을 짓눌러오는 미야마의 무게가 그저 좋았다. 나루미는 미야마를 매트리스 옆에 눕혀놓고서 꿈 속에서는 차마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리석게도 한동안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만큼의 애정 표현을 돌려줄 작정이었고, 미야마가 절대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도 생생한 꿈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내가 널 한 팔로 감아 들어 올렸다니까? 얼굴은 지금이랑 똑같았어, 물론 포동포동하게 어린 얼굴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나 히로토 어릴 적 사진 본 적 없는데, 왜 보여줘도 되잖아… 근데 정말 너무 귀여웠다? 아니, 지금도 당연히 완전 귀엽지! 너무 바빠서 헛것을 봤나봐. 그동안 외로웠지. 저번에 못가서 미안.

 나루미는 두서없이 늘어놓는 제 이야기를 들으며 어김없이 생글 웃으며 올려다보는 미야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구 문질러댔다. 작은 탄성을 내뱉는 미야마의 너른 어깨를 계속해서 매만졌다. 꼬마 미야마는 정말 귀여웠지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걸 못하는 줄 알고? 다시는 너랑 만나지 못할까봐?

 “우리 아기 만들까?”

 “…3점.”

 “나 말장난 한 거 아닌데.”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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