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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팬픽/쇼쥰] 여름밤

SPICA*쥰 2018. 7. 25. 20:50

* ‘야구공’을 먼저 읽고 싶으시다면




─ 쇼군, 바빠?

─ 주말에 시간 돼?


마츠모토의 버릇은 여전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전에 우선 사쿠라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막상 돌이켜보면 그 입에서 그 어떤 제안이 나왔다 하더라도 사쿠라이 쪽에서 거절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 마츠모토는 늘 그렇게 확답을 받아두고서야 본론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버릇없다는 평을 듣기는커녕, 사쿠라이도 차마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잘 챙길 정도로 섬세한 아이여서─그 왜 있지 않은가, 어르신들의 물잔이 빈 걸 재빠르게 알아채고서 먼저 물을 따라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곤 하는 그런 세심함. 중학생 때부터 그런 것을 챙길 줄 안다는 게 얼마나 드문 마음씨인지 사쿠라이는 대학생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을 탄복하게 할 때도 있었는데, 유독 저한테만은 어린애처럼 굴었다.

사쿠라이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둘이서 서로의─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부분은 마츠모토의─ 억지를 들어주네 마네 하며 아웅거리는 걸 보면서, 어른들도 몇 번이고 이야기 했었으니까. 그렇다고 진심을 다해 다툰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아들이 설령 마음이 상했을까 싶었던지 어머니는 마츠모토가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막내라 그렇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타고난 성격 뿐만 아니라 형제 터울과 가정 분위기도 성격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잖니, 그 집 하는 거 보면 그러고도 남지. 그래도 우리집은 안 그렇잖아요? 사쿠라이 집안의 내력이라면 내력이랄까.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작았어도, 어릴 적부터 제 오빠보다도 훨씬 똑부러지고 의젓했던 여동생보다는, 찌르면 찌르는대로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동생이라 마냥 귀여워라 했던 것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역시나 너무 오냐오냐한 탓이지. 어디에선가 읽은 표현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마츠모토를 앞에 두고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키운 것일까 같은 늙수그레한 말을 한숨 섞어 내뱉곤 했던 고등학생 사쿠라이가 있었다. 그러면 중학생 마츠모토는 누가 들으면 업어 키운 줄 알겠다고 부루퉁하게 중얼대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너 처음 봤을 때 정말 요만했는걸. 물론 나도 작았다지만.

그 말랑말랑한 볼에 심통을 가득 담아 쏘아보는 그 표정도 못본 지가 꽤 되었다.


“요즘이야 싸늘하지.”

“아주 냉랭하지. 우리 귀염둥이 막내, 사춘기가 늦게 왔지 뭐야.”


메구미의 말에도, 예전 같았으면야 조무래기 같은 손을 휘저으며 제 누나 어깨에 매달려선 자기 놀리지 말라고 빼앵- 거리곤 했을텐데. 두달 만에야 얼굴을 비춘 사쿠라이가 오히려 객식구인냥 끼어버렸지만─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이지만─ 사쿠라이네 거실에 편하게 흩어져 앉아 딱히 챙겨보지도 않던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았던 주말 오전. 언제나처럼 사쿠라이와 메구미가 쿵짝거리며 저를 놀리는 말을 듣고서도, 소파에 한쪽 발을 올리고선 그 무릎에 턱을 괸, 삐딱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눈을 치켜뜨기만 할 뿐, 별 대꾸 없던 마츠모토는 정말이지. 정말 이거야말로 자식 다 키워내고서는 서운한 마음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라 사쿠라이는 저도 모르게 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고등학생 되고서는 메구미랑도 덩치 차이가 한참 나지, 아마.




평소 대학생 사쿠라이가 동기나 친구들에게 쓰곤 하는 말투대로라면은 ‘너 이 자식은 보름 만에 연락하는 주제에 이딴 예의는 어디서 배워먹은 거냐’ 같은 거친 말이 튀어나올 법 했겠지만, 사실 간만의 연락에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조금 더 솔직하게는 그 녀석이 자신을 상대로 편하게, 다시금 그 변하지 않은 제멋대로인 성격을 내비치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조금은 설레서.


─ 쥰군, 뭔데 그래?


기차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걷고 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남짓의 거리였지만, 매일 왕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과 생활은 물론이고, 축구 동아리에 스터디 그룹에, 그동안 모범생 사쿠라이가 세밀하게 꿈꿔왔던 충실한 대학 생활을 수행하기 위해 입학하고 한두 달 만에 바로 학교 앞 작은 방을 빌려 독립했다. 제 수험이 끝나기 무섭게 곧이어 수험에 돌입하는 동생과 이제야 초등학생이 된 동생이 있는 집에서 저 하나쯤 손이 덜 가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한 시름 놓았다며 너무 기뻐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에 그래도 장남인데 좀 아쉬워해달라며 괜한 엄살과 애교를 부리기도 했었더랬다.


“사쿠라이, 뭐해? 술 안 마시냐?”

“야, 미안한데. 나 먼저 가본다.”


맥주 잔이 비어버린 참에 일어서기로 했다. 마츠모토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들여다보고 있던 폰을 탁 소리가 나게 접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학기말 레포트가 남은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이제 대부분 종강을 맞아 여름방학에 접어들었고, 한산해진 캠퍼스 주변에는 목요일 이른 저녁부터 술집에 삼삼오오 자연스레 여러 무리가 모여들었다. 누군가의 실패한 연애담 이야기─인지 아니면 어느샌가 화제가 바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미 한참을 듣지 않고 있었다─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와글거리는 소리 위로 적당히들 마셔, 인사를 남기고 먼저 빠져나가는 사쿠라이가 싱글거리는 것에도 다들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같이 공을 차곤 했던 동네 친구들도, 저를 걸어다니는 놀이기구쯤으로 여기고 있던 막내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마츠모토에게는 그래도 주말마다 본가 올 테니 과외는 주말에만 하면 되지 않겠냐며 그렇게 달래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즈음의 마츠모토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쿠라이를 싫어했겠지만. 키도 훌쩍 자라서는 어느샌가 사쿠라이와 눈높이가 같아진 데다, 몸은 여전히 가는 주제에 떡 벌어진 어깨는 제가 내심 시샘하기도 한 것이었다.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후로는 짧은 머리를 한껏 모아 세우기도 했다가, 어느 날에는 꽁지를 묶은 채로 나타나기도 했고, 최근에는 몇 가닥에만 백금색 브릿지를 넣기도 하며 온갖 멋을 부렸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도 제가 입었던 똑같은 교복을 입고,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마츠모토를 보며 사쿠라이는 여전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일종의 뿌듯함 정도로 치부해 왔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야구는 어차피 큰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수험생이 되며 접어두었댔는데, 요즘에는 뭘 좋아할까? 역시 수험생에게 그런 건 사치려나. 지난 겨울이 끝날 무렵,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 같다면서 2년 넘게 해오던 과외도 슬슬 그만하자고 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 부탁이 있다며 들어줄거냐고 무작정 제가 원하는 바를 들이밀던 마츠모토. 난데없이 과외를 해달라던 거였는데, 딱히 그런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가끔씩 물어보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에 인색한 적 없던 사쿠라이였다. 마츠모토의 과외는 규칙적이고 가벼운 용돈 벌이? 가족끼리 너무 가까운 탓에, 마츠모토의 어머니에게서 과외비를 받을 때마다 사쿠라이는 겸연쩍어 하곤 했다. 마츠모토는 그럴 거면 그 돈으로 영화나 보여달라고 말하곤 했고, 기어코 제가 보고 싶어했던─그렇게나 둘이 같이 영화관에 다녔던 게 이상하리만큼, 둘의 영화 취향은 전혀 달랐다─ 영화 티켓을 사쿠라이가 사게 만들었다. 뭐, 진짜로 싫었으면 같이 안 봤겠지만서도.

이제껏 해왔던 만큼만 성실하게 1년을 보낸다면야 크게 문제 없을 거라고 격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매주 주말마다 본가에 오지 않아도 되어 잘됐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마저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마츠모토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입생 1년은 주말마다 본가에 갔다가 마츠모토의 집에도 들르고 했던 것이 이제는 2, 3주에 한번 가족 식사 약속이 잡힐 때에나 내려갈 뿐이었고, 마츠모토를 만나게 되는 것도 그만큼 더 드물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맥주 몇 잔 마시지 않아 아주 가볍게 올라오는 취기에 머리가 가벼운 상태. 후덥지근한 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학교 앞 복잡하게 늘어진 골목길을 헤쳐 걸어가는 발걸음이 느릿하면서도 즐거웠다. 이번 학기도 보람차게 끝. 여름 방학 계획은 이것저것 잔뜩 세워두긴 했다. 그 전에, 생각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본가 가서 며칠 쉬다 오는 것까지도. 아, 그러고보니 왜 답장이 없어.


─ 왜 불러 놓고 답이 없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에게서부터 조금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경계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서, 그 알 수 없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사쿠라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장면들이 있었지만, 처음이라면 아마도 제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손가락으로 톡톡 튕겨보이던 마츠모토. 대학 첫 중간고사 기간에도 주말 과외는 미루지 않겠다며 기어코 내려와놓고서는 피곤한 나머지 잠깐 엎드려 잤던 모양이었다. 잠결에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반대쪽으로 돌아간 고개에, 그 귀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 어느새 잘게 거뭇하게 올라온 턱 아래 수염 자국. 마냥 귀여워해왔던 얼굴이 없었다. 잠시간 마츠모토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 나도 쇼군처럼 금발이나 해볼까.”

“안 어울릴걸.”

“어떻게 알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왜 몰라. 너 봐온 게 몇 년인데.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말은 쉬웠다. 낮에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간 것도 무색하리만큼 무덥기만하고, 맨살갗에 닿아오는 공기마저 끈적하게 느껴지는 여름밤. 한 손으로는 폴더폰을 튕겨 열었다 닫았다 하며 걸어가는 내내 상념에 잠기기도 쉬웠다. 그땐 그랬지.

마츠모토네 창문 방충망에 붙어 있던 벌레를 떼어내주다가도 꼭 한 번씩은 어린 마츠모토를 놀려주곤 했던 여름밤. 모기야 보이는 족족 손가락으로 눌러버리곤 했는데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까맣고 반짝거리는 벌레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나 쇼군 정말 미워, 하던 그 새된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년쯤일까, 재작년일까. 가족끼리 밥 먹던 중에 그 이야기가 나오자, 마츠모토는 귀까지 벌개져서는 제가 언제 그랬냐고 항변하더니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말을 걸지 않았더랬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마츠모토가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그렇게 형처럼, 친한 친구처럼 잘 따르고, 잘 지냈던 것만 그리워하면 좋을텐데.

등에 닿아오던 이마에 뒤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려서 페달만 밟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보다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플랫폼까지 바래다준다며 따라나온 마츠모토를 돌아보지 못하고 동네를 빠져나가는 기차에 올라타던 그 마음이, 아직도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다.




─ 나 부탁이 있는데.

─ 쇼군이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이 앞 골목만 돌면 자취방.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담배를 사고 나오는 길에서야 겨우 마츠모토에게서 답장이 왔다. 어쩐지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전개. 어쩐지 어떤 부탁인지 알 것 같아. 그렇지만 그 부탁이라는 것을 아직은 들을 준비가─듣는다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들어주고야 말 자신을 사쿠라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되지 않았는데. 비겁하게도, 몸을 감싸는 열기를 자꾸만 더운 밤의 탓으로 돌렸다. 알콜 때문이라고. 

가로등 불빛 덕분에 다행히도 참담한 꼴은 면할 수 있었는데, 발걸음을 멈춘 사쿠라이 눈 앞에 집 앞 화단 가장자리에 가방을 깔고 그 위에 걸터 앉은 마츠모토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 방학 아니잖아, 내일 수업은? 어머니는 아셔, 너 여기 있는 거?


“…… 마츠모토, 여기 어떻게 왔어?”


여러 질문 중에 겨우, 하필 겨우. 그제야 푹 숙이고서 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보인 마츠모토의 이마 라인을 따라 잔머리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발갛게 번진 눈가 옆으로, 옆얼굴을 따라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여름 교복만 입고선 저를 빤히 바라보는 마츠모토는 또 한번 사쿠라이의 여러 상념들이 무색하리만큼 여전히 어려 보였다.


“보고 싶어서.”


그럼에도 부끄럽다며 칭얼거리거나, 창피하다며 툴툴대는 마츠모토도 아니다. 어느새 또 한 걸음 앞서 나가서 아직도 머뭇거리는 사쿠라이를 마중 나온 마츠모토. 혼자서 여기까지, 무작정 찾아온 그 마음을 차마 달려가 껴안지 못한 것은 오늘밤 아직 그렇게까지 취하진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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