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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아라시팬픽/쇼쥰] Shiver

SPICA*쥰 2018. 10. 31. 01:44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당장이라도 보고 싶던 얼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1교시도 시작하지 않은 이른 시각, 중간고사 기간이 끝이 나고 어느덧 쌀쌀해진 캠퍼스. 선배의 동선 쯤이야 이미 훤히 꿰고 있으니까. 지금쯤이라면 자주 가곤 하는 산책로 벤치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학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학과 건물 앞 흡연 구역에 있을 테지. 다행히 첫 번째 탐문 장소였던 식당 한구석에서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다짜고짜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사쿠라이 선배.”

“아아, 마츠모토. 놀랐잖아. 언제 왔어?”

“선배는 연애 안 해요?”


수십 번을 생각하고서도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이 있기도 한 반면, 어떤 결정에 있어서는 한 번 마음 먹으면 무조건 달려가고야 만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만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오롯이 저만이 내린 결정만으로 얻어낼 수 없다는 것쯤 모르지 않았지만,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발을 도로 집어 넣으며 다짐했다. 오늘은 고백한다. 몇 달을 냉가슴을 끌어안게 하고, 천하의 마츠모토 쥰을 자기 연민에 빠지게 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고선,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기꺼워하며 받아낼 준비가 되어있다, 이야기하기로 말이다.


“글쎄. 이유를 묻는 거야? 아니면 따지는 거야? 너 아침은 먹었어?”

“먹고 왔어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게 어디 있어요?”


분명 갑작스러웠을 질문에도 놀라지도 않고 젓가락으로 생선을 발라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접점은 별 거 없음에도 의외로 잘 어울려 다니는 선후배 정도로 한 학기를 지냈는데 여름을 지나오는 동안, 무엇이 계기였을까.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찬 대형 강의실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 캠퍼스에 들어서는 제 발걸음마저 들뜨게 하는, 언제나처럼의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나가며 태연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도 저를 한없이 지치게 하고, 만날 수 없는 밤마다 제 머릿속을 흩트려 놓고,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그 사람은.


“갑자기 뭐냐. 너는 그게 왜 궁금한데?”


이런 제 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자꾸만 색을 덧입혀온 제 상념과 망상 속의 본인의 모습을 버거워하면 어쩌면 좋지. 아니다, 더 이상 혼자 붙들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갖고 고민하는 것은 어젯밤까지 만의 일이다. 난 오늘부터 새 사람이니까 오늘의 나는 사랑을 쟁취하는 사람이다.


“왜 궁금한지, 선배도 알잖아요.”

“…모르겠는데.”


당당하게 선언하는 제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발뺌하는 눈빛에 돌려주는 것에 잠깐 화가 날 뻔했다. 그렇지만 모를 리가 없잖아. 제가 왜 굳이 지금 듣지 않아도 되는 전공 수업을, 관심 없던 교양 수업을 듣는지. 수업 끝나면 늘 들르는 카페에, 부르지도 않은 술자리에 따라다니는지. 게다가 술자리에서나, 함께 담배 피울 때 은근하게 훑어보던 시선을 제가 아직도 못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제 와서 모르는 척, 무결한 척 하고 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흔들어 놓아야 하지.

충동적인 결정에 뒤따르지 않은 것은 차분한 인내심이어서, 어떻게 고백하고 어떻게 대답을 듣겠다는 계획이라 할 만한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 말이나 내뱉을 작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모로가든 제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랑 잘래요?”


이건… 그래, 다 사쿠라이 쇼의 탓이다. 맹세컨대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절대. 나름 이 상황을 뒤흔들어 주도권을 가져올 만한 일격이라 생각한 것인데, 선배는 여전히 커다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만 있다. 웃어넘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못 들은 척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제 반응을 궁금해하며 지켜보는 저 교묘하고 머리 좋은 남자 때문에, 이렇게나 또 멍청하고 부끄러운 순간을 조금 견뎌내야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난 또. 고백하는 줄 알았네.”

“…제가요?”

“그럼? 내가?”


이상한 질문에 더 이상하게, 엉뚱하게 대답하는 선배의 대답에, 얼이 빠진 제가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있노라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선배의 폰이 작게 진동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그것도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겠다며 다짐한 저를 앞에 두고 뻔뻔하게 대꾸하고 이리저리 달아나며, 자연스레 폰을 들여다보는 선배. 개강을 앞두고 무리 여럿이서 만났던 술집 밖 골목에서, 유달리 취기에 올라 흥에 겨운 몸을 가누지 못하길래 어깨를 내어주려 한 저를 양팔로 끌어안았던 선배. 장난스럽게 밀어내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없는 그에게 한참을 가만히 안겨 있기만 했던 그날 밤. 메일에 답장을 쓰고 있는 선배를 굽히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겨우 폰을 다시 내려놓는 선배의 정수리에 다시 한번,


“선배, 저 좋아해요?”


선배는 입 한가득 넣은 밥을 씹어 넘기다 말고, 시선을 들어 빤하게 마주쳐왔다. 그는 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미 날 사랑하고 있다. 수 천 번을 되뇐 끝에 이제는 정말로 마음 깊이 믿고 있는 이 사실만이 내가 유일하게 붙들어 온 것인데, 


“결국 이 질문에 답이 필요해서 나 찾아온 거구나?”


자신의 패는 하나도 보여주지 않은 채 자꾸만 떠보기만 하는 것은 대체, 사랑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특징일까. 다른 사람에게 사랑해달라고 애원해본 적 없는 사람의 여유일까.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저를 안달나게, 매달리게 한 사람이 없어 낯설기만 한 건 마찬가지거든.


“…아닌데요.”

“그럼 아까 그 질문?”

“됐어요. 필요 없어요. 하지 마요.”


애초부터 짝사랑을 그동안 이렇게 끌어왔던 것부터가 저답지 않았다. 이제껏 고백이 어렵지도,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 이후가 두렵지도 않았는데. 분명 선배 쪽에서 보내는 신호가, 시선이 아닐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선배 쪽에서 먼저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궁금했다. 선배와 키스하면, 담배의 쓴맛이 날까. 소이 라떼의 맛이 날까. 그 짜릿한 호기심도 더 이상 상상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딪히는 것 뿐이었는데.


“음, 같이 자는 거라면 나쁘지 않아.”


어라,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무슨 말인지 몰라요?”

“나도 알고 대답하는 거야.”


이쯤 되면 대차게 망한 고백인 건가? 아닌가? 잠깐 생각을 골라야할 것 같은데, 어쩐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웃음 섞인 숨을 잘게 뱉는 기름이 묻어 번들거리는 선배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걸. 아직도 제가 원하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이야말로 가장 근접한 기회니까. 아닌척 해보려 했지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했다. 


“…그럼 그 다른 질문은요?”

“필요 없다며.”

“필요 없다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자꾸만 달아나려는 말꼬리를 잡아채려다 결국 저도 모르게 크게 튀어나온 말 소리에 당황함을 감추려 하면, 한 몇 초 후 선배가 정말 커다랗게 웃었다. 새빨개진 얼굴이 귀엽다면서, 등을 뒤로 젖혀가면서까지 웃을 일인가. 아침에 상상했던 결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적어도 먼저 고백하게 해서 미안, 같은 말을 걸어주는 다정한 선배의 모습이 있었는데 대체 어디 가버린 거냐고. 사실 이마저도 좋아서 큰일이지만. 근데 왜 나만 이렇게 좋아해? 왜 나만 이래?


“왜.. 왜 웃고 그래요? 웃으면 좋아요? 왜? 난 선배 하나도 안 좋은데!”

“야, 왜 그래. 누가 들으면 너 고백했다 차인 거 같잖아.”

“누가 고백을 해요? 방금 못 들었어요? 안 좋아한다니까요!!”


약간 높아진 목소리에 아까보다 조금 더 붐비는 식당. 다른 학생들과 식당 직원들이 흘끔거리는 것들이 느껴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이제 곧 틈을 보일 것 같은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맞잡았다 하던 손을 저도 모르게 어느샌가 주먹을 쥐고 있던 모양인지, 한 손을 감싸 쥐는 선배의 손이 느껴졌다.


“이거 놔요. 나 수업 들어가야 해.”

“너 1교시 없잖아. 1교시 뿐만 아니라 오전 수업 없는 날인데, 이렇게 일찍 식당에 나타난 건 나 보러 온 거잖아. 수요일 교양 수업 전에 벤치 찾아오는 것도, 잘 안 피우는 담배 같이 피러 오는 것도.”


그제서야 발견한 맞은 편 얼굴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겨우 마음을 놓았다. 정말 겨우. 몇 달 간 티나는 것 모르지도 않으면서 쫓아다니면서 하나씩 더 알아가던, 새벽까지 방에서 홀로 뒤척이며 상상하던 내가 차마 파악하지 못한 선배. 주도권 뺏기기 싫어함. 은근 까탈스러우면서도 능청스러움. 뻔뻔함. 그렇지만 오히려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났을 때, 차오르는 승부욕. 승부욕이라 하면 또 마츠모토지.


“아는 척 하지 마요. 선배가 모르는 나도 있어요.”

“다 안다고 한 적 없어. 그렇지만, 방금은 틀리진 않았지.”


‘사실 나도 너 좋아해왔어’ 같은 대사가 있었던 간밤의 상상과는 많이 달라졌고, 아침부터 못 볼 꼴 보인 것도 같은 마음에. 괜한 심술에 손을 홱 뿌리쳤다가, 놀란 눈을 뜨는 선배를 살짝 흘겨보고선 다시 슬그머니 마주 잡았다.


“그냥 내가 잡으려고.. 근데 선배, 아직 제대로 대답 안 했어요.”


작게 중얼거리자 테이블 위에 맞잡은 서로의 손을 바라보는 선배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크게 들렸다. 아닌 척 하지만 지금 매우 두근거리고 있죠, 선배.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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