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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아라시팬픽/쇼쥰] 어리광

SPICA*쥰 2017. 7. 16. 01:49

더-워-.

굳이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머리카락이 흠뻑 다 젖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체온으로 달구어지지 않은 침대 시트 위 공간을 찾아 몸을 뒤척여보려다, 제 몸 위에 잔뜩 널부러진 팔다리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된 마츠모토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너무 덥잖아. 제 아무리 서로 ‘아직도’ 좋아 죽는 사이인들, 이런 무더위에 타인의 체온까지 덧대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제 허리를 감싸고 배꼽 앞으로 둘러져 있는 팔 하나, 두 다리 사이에 기어코 발목을 끼워넣은 다리 하나, 그리고 종아리 위에 턱 하고 올라와 있는 다리 또 하나.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열기를 건강하게 뿜어내는 신체였지만, 그렇다고 곤히 자고 있는 상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에 하나씩 천천히 들어올려서, 등 뒤로 툭- 던져 밀어내고서야 겨우 좁은 틈을 확보한 마츠모토는 서로의 체취가 가득한 시트에 등을 대고 누웠다. 

여섯시쯤은 됐을 것 같은데, 하며 침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어야 할 전자 시계는 없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조명 위로 벽 높은 곳에 걸린 시계의 시침을 확인하기 위해 마츠모토는 실눈을 가늘게 떴다. 십 분 후면 오전 다섯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 또 깜빡거렸다. 곧 동이 터올 시간이긴 하지만 다시 잠들어도 무리 없는 시각이었다. 특히 하루 종일 오프인 오늘처럼 드문 날에는. 그렇지만 어쩐지 귓가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츠모토는 가능한 공간 내에서 힘차게 기지개를 한번 하고서는 여전히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침대 한 쪽에 걸터 앉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마츠모토는 익숙한 걸음으로 어두컴컴한 방을 가로질러, 드레스룸 두번째 장롱 아래쪽 서랍 속 잘 개켜서 놓여진 제 드로즈를 꺼내 입었다. 씻어야 하는데 조금만 이따가. 둘이서 번갈아 가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결국에는 그냥 잠들어버린 듯 했다. 게다가 밤새 땀을 흘린 몸은 온통 끈적끈적했지만,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맨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상대에게 보이는 것은 마츠모토의 타고난 성격으로선 씻지 않고 속옷을 입는 것보다도 훨씬 꺼려지는 것이었다.

“진짜냐고.. 고장?”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썹에 와 닿는 게 느껴지자, 마츠모토는 아까부터 머릿속을 채우던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나섰다. 전원으로 보이는 제일 왼쪽 가장 길다란 버튼부터 모든 버튼을 눌러봤지만, 침실 안 에어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츠모토는 이런 더위에서도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사람을 잠깐 바라보다가, 암막 커튼 뒤로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놓고서는 침실을 나섰다. 그렇다고 찬 바람 때문에 깨버리면 안되니까.

 커튼을 치지 않아 벌써 사물의 형태가 쉽게 파악될 정도로 밝아진 거실로 나가면 여기저기 벗어던진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새삼스레, 라는 소리를 매번 들으면서도─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서도─민망스럽다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현관까지 늘어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올려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허벅지 뒤쪽과 등허리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마츠모토는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와의 잠시간의 눈싸움 끝에, 적당히 미지근한 물로 타협을 보고선 몸을 적시며 지난 밤의 흔적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답지 않게 이렇게 이른 시각에 개운하게 일어나서 샤워까지 하고 있는 것은 간밤에 너무 일찍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간만에 레귤러 촬영 외 처음으로 멤버 다섯이 모일 수 있는 스케쥴이 정리되자 마자 새 앨범 및 콘서트 방향 기획을 위한 회의가 있었고, 그 후 멤버들끼리 간단하게 소바만 먹고 깔끔하게 헤어진 게 여덟시 무렵이었다. 스탭도 매니저도 물리고선 다섯만 오롯이 남게 되자 피곤한 기색을 무리해서 숨기지 않는 사쿠라이를 보며, 마츠모토는 반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따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사쿠라이의 차 열쇠를 건네 받으며 함께 차에 올라타, 사쿠라이의 집에 온 것이었다.

며칠 전을 기점으로 바쁜 여름은 어느 정도 갈무리되었다. 간만의 연속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연달아 들어갔던 영화 촬영도 마무리되었고, 봄여름 계절을 넘어 길게 늘어서 진행했던 아레나 투어까지도 이제 모두 끝이 났다. 물론 바로 또 새 앨범의 프로듀스 및 콘서트 투어 기획에 들어가야 하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정들에 바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면은 조금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일정이었다. 

거기에다 2주 정도 떨어져 있다 돌아온 연인. 한 해 걸러 반복되는 일정으로 별스러운 것 아니라는 식으로 서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2년 전, 4년 전과 그리고 8년 전, 마츠모토와 사쿠라이의 관계는 늘 지금 같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그를 반기는 마츠모토의 태도 역시 지금 같을 수는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새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유별나게, 반갑게 ‘지금’을 함께 축하했다.  



뽀송뽀송, 커다란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말리고 욕실을 나선 마츠모토는 다시 또 땀을 흘리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 제발 거실 에어컨은 된다고 해줘. 잠기운도 이미 사라져버린 이 새벽 시간에 뭘 하면 좋으려나. 어제 낮에 읽던 추리 소설이나 다시 읽을까 싶어 현관 어드메에 던져놓았을 가방을 찾으러 가면, 잠에 취해서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침실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사쿠라이와 마주쳤다. 

“놀래라. 깼어?”

엉망으로 헝클어진 뒷머리의 사쿠라이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서는 “어, 너 없길래” 하고서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흠뻑 젖은 전라의 몸으로, 등을 벅벅 긁으며. 


마츠모토는 냉장고를 열어 보고선 채워넣어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에 바쁘게 써내려갔다. 얼마간 집을 비웠다지만 이렇게까지 비어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캔맥주 두 개를 꺼내 거실 티테이블에 코스터를 받쳐 올려놓고선 소파에 앉았지만, 이내 흐물흐물 녹아 내리듯 소파에 크게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누운 자세 그대로 있는 힘껏 손을 뻗어 테이블 위 에어컨 리모콘을 누르자 다행히도 거실 에어컨은 힘차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막상 가방에서 안경과 책을 꺼내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시원한 곳에 누워 버렸더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베란다 너머로 하늘에 동이 트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 한가득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은 여전히 젊구나.

“뭐가 젊어?”

“응?”

샤워기 물소리가 그치는 소리, 욕실에서 나와서 침실로 들어가는 발걸음 소리 같은 걸 멍하니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사쿠라이는 반팔 티셔츠와 드로즈를 입고 나와서는 마츠모토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감기 걸려. 마츠모토는 사쿠라이가 건네주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받아서는 추리 소설 책을 올려놓았던 배 위에 함께 올려놓았다.  


“새벽부터? 더 안 자려고?”

티테이블에 놓인 캔맥주를 발견한 사쿠라이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이내 마츠모토의 머리 위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소파에 앉아서는 급하게 벌컥벌컥 몇 모금을 들이켰다. 소파에 뒷머리를 대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자 거꾸로 보이는 사쿠라이의 얼굴은 샤워를 하고 나왔음에도 여전히 더위에 열이 오른 얼굴이었다.

“쇼군, 침실 에어컨 고장난 거야?”

“응, 돌아왔더니 안 되더라고. 관리인에게 한번 봐달라고 연락 한다는 걸 깜빡했네.”

“그럼 우리집으로 갈 걸 그랬네.”

어느새 한 캔을 다 비운 사쿠라이가 캔을 내려놓고선 마츠모토를 내려다봤다. 맥주캔 뜯어줄까? 마츠모토가 과장스레 좌우로 내저은 고갯짓을 멈추자, 사쿠라이는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위로 쓸어넘겨 주었다. 

“한번 누웠더니 일어나기 귀찮아졌어.”

“안경은 왜?”

“샤워하니 잠도 다 깼구.. 책이나 읽을까 하고.”

“잘 자던 애인 깨워 놓고, 혼자 책 읽으신다고?”

“내가 언제 깨웠어.”

“그거야 당연히 없어지면 깬다고.”

“쇼군도 더워서 깬 것뿐이면서.”


마츠모토의 헤어라인 근처 잔머리를 습관처럼 몇 번 만지작거리던 사쿠라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결국에는 마츠모토의 안경을 벗겨냈다. 그러자 마츠모토는 제 배 위에 올려두었던 책과 옷도 머리 위로 들어올려서 사쿠라이에게 억지로 건네고서는, 팔꿈치로 소파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뭐 하는 거야, 하하하.”

등 뒤로 들리는 사쿠라이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마츠모토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소파를 거슬러 올라, 기어코 사쿠라이의 허벅지에 뒷머리를 맡기고서야 만족한 듯이 웃어보였다.

“쇼오-상!”

“윽… 간지럽다고!”

간지러워 하며 엄살을 부리는 사쿠라이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마츠모토는 뒤통수에 힘을 줘서 몇 번 허벅지를 문지르다가 사쿠라이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사쿠라이의 티셔츠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좋았다. 제가 고른 것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마츠쥰, 너 이렇게 있으면 추울텐데. 에어컨 끌까?”

“아냐, 괜찮아.”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허리춤에 맞닿은 코로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켜 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쿠라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뭐야, 왜 이래.”

마츠모토는 양 팔을 사쿠라이의 허리에 두르고선 제 몸을 바짝 붙였다. 한 겹의 천 너머로도 사쿠라이의 체온이 마츠모토의 맨 살에 바로 전해져 왔다. 

“춥지 않게 쇼군이 안아주면 되잖아.”

사쿠라이의 이 표정이 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이 표정. 마츠모토의 제멋대로에, 어리광에 귀엽다는 듯이 가끔은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표정. 결국에는 제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거면서. 쇼군은 내가 좋으니까. 나를 좋아하니까. 자신이 제멋대로인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좋아해준다는 확신과 그로부터 자라난 자신감을, 시간이 생각보다는 조금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해서는 틈이 날 때마다 기어코 그의 이야기를 하고 마는 그런 마음. 여백마다 두근거리는 손으로 이름을 써넣고, 그의 모든 것에 나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나만 아는 그 사람의 이야기, 나만 볼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심.


“조금만 애교 부려도 징그럽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제 기분 내키면 애교가 넘쳐나죠.”

“싫다는 것처럼 들려.”

“나한테만이야.”

둘만 있을 때만 보여주는 저의 응석이 그 만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새롭게 확인과 다짐을 받아내는 사쿠라이에, 이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이 자신만만한 남자가 내비칠 때마다 마츠모토는 또 한번,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했던-그것도 조금은 분하지만, 지금 눈 앞의 사람에게- 그 작고 어렸던 마음이 응답받는 것만 같아 약간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쿠라이의 손이 제 등을 커다란 원을 그리며 쓰다듬는 걸 느끼며 마츠모토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었다. 쇼군, 고마워.


“오늘 오프지? 역시 눈 좀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오늘, 그 있잖아, 별이 밝아지는 날인데.”

“응?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나흘에 한 번.. 겹치기로 했잖아.”

마츠모토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면, 사쿠라이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더 이상의 힌트도, 답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무슨 이야기였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겨우 떠올랐다. 와쿠와쿠. 

“아, 그거 거절한댔잖아.”

“에--- 에? 진짜?!”

그렇게 갑자기 크게 소리 지르면 아무리 인생의 사랑이라고 해도 조금은 짜증날 정도로 우리 지금 엉겨붙어 있다고. 마츠모토가 사쿠라이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꾸우욱 눌렀다. 

“뭐 어젯밤에도 했고. 일단은 에어컨 고칠 때까지는 사양하겠습니다.”

“침대에서만 하란 법 있나. 여기 시원한 곳에서 하면 딱 좋잖아, 그지? 쥰.”

아, 비겁해. 그렇게나 ‘쥰’으로 불러달라는 마츠모토의 발언─퍼블릭은 물론이고, 프라이빗에서도─에도 벌써 20년간 입에 익은 걸 어쩌냐며 둘만 있을 때에도 ‘마츠쥰’, ‘마츠모토’로 부르는 주제에, 이렇게 교활하게도 ‘쥰’으로 불러야 할 타이밍은 절대 놓치지 않는 사쿠라이였다. 그것도 달콤한 저음으로. 어떻게 하더라도, 마츠모토가 이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뻔한 수작에 한 큐에 넘어가버릴 수는 없는 마츠모토가 잠시 대답하지 않은 채 있으면, 사쿠라이는 두 눈을 감은 채 우스꽝스럽게 입술만 쑥 빼서는 맞대어왔다. 어떻게든 튕겨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츠모토는 눈가가 접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쥰.”

고요한 여름 새벽. 나른하게 이어지던 키스 중간에 사쿠라이가 입을 떼어내고, 이마를 맞대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마츠모토의 눈꺼풀 뒤로 몇 년 전, 아니 십 여 년 전의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직도 채 다 아물지 못했을 정도로 가장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도, ‘이 별 위에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터져나올 만큼의 행복을 주었던 것도 모두, 전부 사쿠라이였다. 

“쥰.”

“…듣고 있어, 쇼군.”

마츠모토가 겨우 눈을 뜨고 올려다보면 사쿠라이가 눈썹을 낮추고서는 웃고 있었다. 언제라도,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은 표정, 이라고 마츠모토는 아득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20년간 고마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뭐야 새삼스레..”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늘 새삼스러운 입술이 다시 맞닿아오는 촉감에,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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