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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ep end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닫은 현관문에 어깨를 맞붙이고서야 사쿠라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겨드랑이 아래로 양팔을 둘러서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어 있는 남자 역시 입안에서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귀를 가까이 들이대어 보아도 어떤 단어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아무런 보호막 없이 맨 목덜미에 바로 닿아오는 숨결이 타오를 듯 뜨겁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사쿠라이는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만 있다면 적어도 5분 이상은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츠모토가 현관 바닥에 주저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몇 년 만의 둘만의 저녁 식사였다. 다른 멤버도, 그 어떤 완충제 역할을 해줄 만한 사람 없이 단둘이서는. 명목상으로는 콘..
마츠모토의 상냥한 얼굴 대신, 고소한 기름 냄새와 작게 울리는 환풍기 소리만이 사쿠라이를 반겼다. 현관에서부터 자연스레 침샘이 돋구어졌다. 이미 밤 늦은 시각, 한참 전에 저녁 식사까지 마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러면 먹지 않을 수가 없지. 외투를 벗어내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몰고 들어온 찬 기운은 금방 사그라들게 만드는 따뜻한 실내 덕분에, 넓게 벌어진 어깨와 흉곽의 라인을 잘 드러내는 남색 티셔츠를 입은 마츠모토의 뒷모습을 부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좋은 저녁.”“응. 수고했어, 쇼군.”“야식?” 응, 안주, 라고 말하는 마츠모토의 어깨 너머로 프라이팬 위 맥주를 부르는 비주얼을 바라보며, 사쿠라이는 입맛을 다셨다. 몸을 관리하는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사치스러운 즐거움을 누리지 못..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당장이라도 보고 싶던 얼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1교시도 시작하지 않은 이른 시각, 중간고사 기간이 끝이 나고 어느덧 쌀쌀해진 캠퍼스. 선배의 동선 쯤이야 이미 훤히 꿰고 있으니까. 지금쯤이라면 자주 가곤 하는 산책로 벤치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학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학과 건물 앞 흡연 구역에 있을 테지. 다행히 첫 번째 탐문 장소였던 식당 한구석에서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다짜고짜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사쿠라이 선배.”“아아, 마츠모토. 놀랐잖아. 언제 왔어?”“선배는 연애 안 해요?” 수십 번을 생각하고서도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이 있기도 한 반면, 어떤 결정에 있어서는 한 번 마음 먹으면 무..
열기가 숨구멍을 죄어올 것 마냥 덥게 데운 욕조에 지친 몸을 누이며 사쿠라이는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 위로 여러 얼굴들을 떠올렸다. 두 손으로 몇 번이고 뜨거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목과 어깨를, 물에 잠겨있는 허리와 골반을 매만지며 몸에 쌓인 피로를 녹여버리고자 하는 익숙한 일련의 과정을 밟다 보면 이윽고 이어지는 행위 역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이유는 나름대로 짐작할 뿐이었지만 유독 사쿠라이에게만 엄하게 대하는 학회 선배의 굵고 검게 그을린 손목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가끔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남자의 척추가 제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던 모습을 되새길 때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앳된 얼굴 아래 성숙한 남자에게 어울릴 법한 색을 머금고 있..
분장실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와 버린 마츠모토가 자신의 생일 서프라이즈 계획을 듣게된 탓이었다. 어느샌가 대기실 안쪽에 들어와 있는 마츠모토를 조금 늦게 발견하고선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즐겁게 제 앞에 펼쳐 놓고 있던 무언가를 감추기 시작한 아이바. 그리고 녹화 전에 답지 않게 들뜬 기분으로 마츠모토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우고선, 뒤따라 대기실로 들어오던 사쿠라이와 함께 복도로 내쫓아낸 오노. 아마 그 둘은 그나마 개중에서 제일, 마츠모토가 쉽사리 내치지 못할 사쿠라이에게 그를 맡기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문 열어, 너네 이미 서프라이즈 망했다고! 나 대본 읽어야 한단 말야.”“포기해. 아이바가 마음 먹으면 어떤지 알잖아.” 언제나처럼 겉으로는 조금 툴툴거렸지만, 자신의 생일을..
* ‘야구공’을 먼저 읽고 싶으시다면 ─ 쇼군, 바빠? ─ 주말에 시간 돼? 마츠모토의 버릇은 여전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전에 우선 사쿠라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막상 돌이켜보면 그 입에서 그 어떤 제안이 나왔다 하더라도 사쿠라이 쪽에서 거절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 마츠모토는 늘 그렇게 확답을 받아두고서야 본론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버릇없다는 평을 듣기는커녕, 사쿠라이도 차마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잘 챙길 정도로 섬세한 아이여서─그 왜 있지 않은가, 어르신들의 물잔이 빈 걸 재빠르게 알아채고서 먼저 물을 따라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곤 하는 그런 세심함. 중학생 때부터 그런 것을 챙길 줄 안다는 게 얼마나 드문 마음씨인지 사쿠라이는 대학생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주변 사람..
“전 남친일까나아….” 문장의 마지막 단어 끝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말투는 너무나도 익숙한 애인의 것임이 분명했는데, 어째 평소의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 정도는 높지 않냐는 부차적인 감상을 가지며 나루미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즉각적인 반박과 함께. “전 남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 히로토?” 미야마 히로토는 나루미 료스케의 올해로 3년차 남자친구로, 이유는 후에 설명할 예정이지만 ‘남자친구’ 앞에는 ‘전’이 붙지 않는다. 절대로! 물론 나루미가 도쿄를 잠시간 떠나 있는 동안, 만 2년 5개월의 연애 기간 중 대부분을 장거리 연애를 해야 했던 것은 온전히 나루미의 탓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았다. 첫째로 어차피 둘 다 함께 도쿄에 있을 때도 사건의 숨겨진..
어디 온천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지? 라는 이야기에 대답하려던 찰나, 테이블 하나 건너편에서 여러 무리와 함께 식당을 빠져나가던 사쿠라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설마 아까 들은 건 아니겠지? 이야기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겠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제 발 저릴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비끼며 걸어가던 사쿠라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츠모토를 바라보고선, 마츠모토를 향해 눈을 찡그리고는 제 동료들을 쫓아나갔다. 왜 저래? 싫어, 진짜 싫다고. 싫은 걸 어쩌란 말야.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자극만으로도 이미 너무나도 벅찬 머릿속에 자꾸만 기어들어 오는 잡념들을 밀어내고 본능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상황 판단 잘 하라는 제 마지막 이성의 신호에 따라 ..
─ 집이야? 조금 전 출발, 1시간 내에 도착 예정. 필요한 거 있어?아침의 메일 이후 따로 공연을 보러 간다거나 어디 마시러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잠시 창밖 가로등들의 움직임을 좇으며 대본과 스케쥴과 기삿거리,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양손에 쥐고 있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 괜찮아. 쇼군,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히 와♥♥평소보다도 솔직한 고백에 하트 뒤에 붙은, 그동안 본 적 없던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에 바로 가서 쓰러지듯 자버릴까 했었던 계획을 바꾼 것은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다. 작게 미소를 띄우고서는 폰 화면을 끄고 잠시나마 눈을 감았다. 최근 사쿠라이의 머릿속 한구석에서 떠나지..
“더-워-.”굳이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머리카락이 흠뻑 다 젖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체온으로 달구어지지 않은 침대 시트 위 공간을 찾아 몸을 뒤척여보려다, 제 몸 위에 잔뜩 널부러진 팔다리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된 마츠모토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너무 덥잖아. 제 아무리 서로 ‘아직도’ 좋아 죽는 사이인들, 이런 무더위에 타인의 체온까지 덧대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옆으로 돌아누운 제 허리를 감싸고 배꼽 앞으로 둘러져 있는 팔 하나, 두 다리 사이에 기어코 발목을 끼워넣은 다리 하나, 그리고 종아리 위에 턱 하고 올라와 있는 다리 또 하나.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열기를 건강하게 뿜어내는 신체였지만, 그렇다고 곤히 자고 있는 상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