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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아라시팬픽/쇼쥰] VERTIGO (회지 샘플)

SPICA*쥰 2018. 10. 23. 19:12

열기가 숨구멍을 죄어올 것 마냥 덥게 데운 욕조에 지친 몸을 누이며 사쿠라이는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 위로 여러 얼굴들을 떠올렸다. 두 손으로 몇 번이고 뜨거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목과 어깨를, 물에 잠겨있는 허리와 골반을 매만지며 몸에 쌓인 피로를 녹여버리고자 하는 익숙한 일련의 과정을 밟다 보면 이윽고 이어지는 행위 역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나름대로 짐작할 뿐이었지만 유독 사쿠라이에게만 엄하게 대하는 학회 선배의 굵고 검게 그을린 손목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가끔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남자의 척추가 제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던 모습을 되새길 때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앳된 얼굴 아래 성숙한 남자에게 어울릴 법한 색을 머금고 있는 마츠모토의 입술의 잔상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손동작에 따로 변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더는 참지 못해 들썩거리는 허리와 함께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욕실을 울리는 가운데─


“…쇼군?”


혼자만의 시간을 가르고 들어온 목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순간이었으나, 한쪽 어깨에 관자놀이를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은 중력의 몇 배를 이겨내야 하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다. 절정을 향해 치닫던 온몸의 근육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방향을 잃어버리고 멈춰버린 탓에, 머리 뒤쪽으로 자그맣게 피어오른 현기증이 보여주는 착각이기만을 바랐다.

마츠모토가 서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음료 테이크아웃 잔에 꽂힌 빨대만이 자그맣게 흔들리고 있을 뿐 마츠모토는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사쿠라이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와중에도 조금 전까지 사쿠라이의 머릿속에서 온갖 색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던 바로 그 두툼한 입술이, 다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살짝 벌어져 있는 모양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그룹 멤버에게 떳떳하지 못할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상상해보지도 못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쳐버린 상황에서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제 자신의 한심한 꼴에 사쿠라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분할 뿐이었다.


“뭐야? 여기, 쇼군.. 집이야?”


최근에야 뜸했을지라도 마츠모토가 수십 번도 더 왔던 곳. 거기다 제가 찾아온 주제에. 그렇지만 이상한 질문이지 않냐는 의문을 가질 여유 따위 이미 사쿠라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수치스러움보다도 먼저 튀어나온 것은 당혹감을 감추기 위한 분노. 이게 무슨 짓이냐며, 왜 남의 집에 인기척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냐고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었냐고. 아마 지금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한 욕설을 내뱉었을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보여준 적 없었을 사쿠라이의 모습에 적잖게 놀란 마츠모토는 등지고 서 있던 욕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힘이 풀린 다리 위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 전날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보았던, 독특한 디자인이 제 마음에 쏙 들었다고 자랑했던 운동화를 신은 마츠모토는 욕실 바닥을 두 발로 밀어내다가 미끄러지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당황해하는 모습은 이내 사쿠라이의 심장을 덜컥 가라앉게 했다. 어쨌거나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어서. 그럼에도 제가 하고 있었던 짓으로 당당하지 못한 만큼 딱 그만큼 더 화를 냈었다.


“당장 꺼지라고, 마츠모토.”


꽉 다문 어금니로 이름을 짓이기듯 읊조리자 그새 눈물이 넘쳐흘러서 속눈썹까지 다 젖어버린 두 눈으로, 그 후로 수없이 많은 밤 사쿠라이가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악몽이 되었던 그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던 마츠모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사쿠라이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숨조차 들이쉬지 못했다.


“마.. 마츠모토? 마츠쥰!”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황급히 욕조에서 빠져 나와 이름을 불러보아도, 분명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만이 상식적인 수순이었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집 현관까지 쫓아 내려가 보아도 마츠모토는 없었다. 욕실 바닥에 남은 발자국과 테이크아웃 잔에서 흘러내린 커피 얼룩만이 사쿠라이가 본 것이 환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새 몸을 휘감는 바람이 회오리라도 일으키는 것마냥 속이 울렁거리는 어지러움이 시작되었다. 발끝이 까마득했다. 떨어지지만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차라리 이대로 까무러치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라도 지상까지의 거리를 직접 체험해야 하는 미래가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라면 그걸 겪기 전에 그냥 숨이 멎어버렸으면.

물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은 많았다. 완전한 제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왕 데뷔했으니 아이돌로서 정상에 한 번쯤은 오르고 싶었다. 여동생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는 것도, 남동생이 프로 리그에 데뷔하는 것도 지켜보기로 약속했었다. 아버지에게는 언젠가 집 한 채 마련해드리고픈 마음도 있었고 어머니와는 둘이서만 해외여행을 가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지 멤버들과 준비하던 계획들. 그리고 마츠모토. 마츠모토와 나,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남아있는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은데-

그러자 마츠모토가 달려왔다. 물론 상공 수십 미터 위에 매달려 있는 사쿠라이에게 달려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었지만. 추위 때문이 아닌, 정신을 놓아버리는 게 현명한 것일지 아니면 어떻게든 의식을 붙들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공포에 주체 못 할 만큼 떨고 있던 제 몸을 한가득 안아오는 손길에, 얼굴을 보지 않아도 마츠모토인 것을 알았다. 마츠모토밖에 없었다. 사쿠라이의 뒤통수를 감싸 제 어깨로 끌어당기는 마츠모토의 큼직한 손. 이미 싸늘하게 식어내린 사쿠라이의 어깨를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안으며 등을 수없이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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